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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3

총몽 · 키시로 유키토

실존의 저주와 사람의 몸부림

총몽 1(완전판) - 교보문고완전판 제1권 : 녹슨 천사 전 세계를 매료시킨 SF 사가 『총몽』 시리즈의 원점!! 미래. 공중도시 ‘자렘’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계. 자렘이 토해내는 쓰레기 더미 주변에 모여 근근이 삶을 지탱하는 인류. ‘고철마을’에 사는 사이버네틱 의사 이도는 쓰레기 더미...product.kyobobook.co.kr

친구의 추천으로 ‘총몽’을 보게 되었다. 무려 1990년대의 만화, 일본 SF 만화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작품이라고 한다.

1권을 덮고 드는 생각은 딱 하나였다. ‘이걸 사람이 그렸다고? 연재로?’ 사이버펑크적인 배경과 잔인한 액션 장면들을 아주 섬세하게 그렸고, 그림에 그 시절의 만화가 낼 수 있는 매력이 너무나도 잘 드러나서 감탄했다. 어렸을 때 종이책으로 봤던 일본 만화들도 총몽의 발끝에 못 미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그림의 매력이 살아있다. 어시도 없이 동생이랑 그린 것 같던데 이 작품을 시간 제한이 있는 연재 형식으로 냈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그림 다음으로 좋았던 요소는 세계관이다. 지금은 ‘사이버펑크’라는 장르로 정립된 세계관인데, 신체의 대부분을 기계로 대체할 수 있는 기술적 발전과 상실된 도덕성을 바탕으로 하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다. 나는 사이버펑크에 익숙하지는 않고, 그나마 접해본 건 ‘사이버펑크 2077’ 게임 플레이 영상 정도? 근데 이 세계관이 주는 매력을 총몽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몽에서는 극도로 잔인하고 부도덕적인 장면이나 등장인물들의 뜨악스러운 의사결정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세계관 덕분에 이 모든 장면과 결정이 비현실적으로 가볍게 떠다니지 않게 되고 그래서 더더욱 충격적으로 느껴진다. 손오공이 “드래곤볼로 살리면 돼 걱정 마” 할 때는 ‘손오공 인성 수준 ㅉㅉ’ 했지만 총몽을 보면서는 그렇게 쉽게 말할 수가 없다. 이런 끔찍한 세상에서 각자도생해야 한다면 나라고 다를까?

세계관에서 시작되는 우중충하고 잔인한 생각은 이야기의 주제까지 뻗어 나간다. 총몽의 매 에피소드는 그 자체로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특히 F1을 연상시키는 모터볼 에피소드는 하나의 만화를 연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 그런데 각각의 에피소드를 다 읽고 나면 언제나 찝찝한 생각이 남는다. 뇌의 일부만 있으면 신체는 얼마든지 기계로 대체할 수 있는 인간성이 상실된 세상과, 규칙이라고는 통치를 위한 최소한만 남은 극도의 불평등 사회에서, 먹고사는 문제 이후에 무엇이 남는지를 나는 계속 생각하게 되었다. 이야기 속의 누군가는 원초적인 쾌락을 위해, 또 다른 누군가는 뒤틀린 이상을 위해, 누군가는 체제에 대한 전복을 위해서 열심히 행동한다. 내가 보기에 이들의 행위 대부분은 하나도 생산적이지 않다. 등장인물들이 의미가 있다고 믿든지 말든지 뭔가를 한다고 그들의 세상이 더 나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는다. 애초에 이미 세상이 이 지경인데 더 나아지고 나빠지고 할 것도 없지. 그럼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행동한다. 그래서일까 난 모든 이야기들이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로 느껴졌다.

‘덴’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 대표적인 이야기다. 덴은 저항군으로서 자신들을 착취하는 공중 도시 자렘에 대항하여 여러 지상 도시를 정복할 정도로 반란에 성공한다. 그 클라이맥스에는 초대형 대포가 자렘을 추락시킬 최종병기로 준비된다. 드디어 다가온 발포 당일, 저항군의 축제나 다름없는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대포는 발포되는데, 대포는 자렘에는 흠집 하나 내지 못하고 압도적인 무력 앞에 저항군이 궤멸한다. 이 끔찍한 결과를 알게 되었는데도 덴은 자렘을 향해 돌진하고 끝끝내 파괴된다. 덴은 온전한 신체도 없는, 증류된 의식이라고 해야 하나 한 인간의 독립적인 정신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기계다. 그럼에도 그 순간 나한테 덴은 너무나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이미 쫄딱 망한 상황에서 아무 실용적 의미 없는 돌진은 뭐 하러 하나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돌진하지 않는 덴은 덴이 아니고 나아가서 인간이 아니다. 이건 정말 실존의 저주다. 먹고사는 행위 너머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성의 저주. 살아있는 동안 끝없이 무언가 행위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그 행위를 모조리 스스로 결정해야만 하는 인간의 모습. 덴이 인간이려면, 그리고 인간이라면 돌진할 수밖에 없는 느낌이었다.

총몽의 모든 에피소드는 읽고 나면 이렇게 찝찝하고 무거운 생각이 남는다. 안정된 현대 사회의 시민으로서 물론 먹고사는 문제를 푸는 것도 상당히 빡빡하긴 한데 나한테는 그 너머에 뭐가 있을까? 이런 고민이 머리를 무겁게 한다. 갈리가 모터볼로 떠나 강철날이 되고 싶다고 하는 마음이 이해가 간다. 본질이 규정된 존재가 된다면 이 저주스러운 실존에서 도망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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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총몽 이후 이어지는 작품인 ‘총몽 라스트오더’도 보았는데 슬프게도 별로였다. 마지막 4권 정도는 꾸역꾸역 봤을 정도로 별로. 총몽의 여러 장면들은 세계관을 감안하면 사건들이 현실적인 범주 안에 있어서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충격도 받고 긴장하기도 했는데, 라스트오더는 작품이 능력자 배틀물처럼 전개되면서 세계관의 매력이 극도로 떨어지고 이야기가 가벼워졌다고 생각한다. 가라데로 에너지파 쏘고 흡혈귀가 나오는 마당에 신체 개조나 유전자 변형은 더 이상 놀랍지도 무겁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겪는 사건과 그에 따른 생각 변화도 갑자기 단조로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재 내내 매 화마다 흥미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의 영향이었을까? 왜 공들여 구축한 세계관의 매력을 떨어트리는 이야기 전개를 선택했는지 아쉬운 마음이 든다. 12권에 달하는 총몽 라스트오더 전체보다 원래의 짧은 결말이 훨씬 마음에 든다.


어렸을 때 친척 집에서 ‘다이어트 고고’라는 만화를 보고 무서워서 며칠간 잠을 설쳤던 기억이 있다. 그때 ‘총몽’이 그 자리에 대신 있었으면 며칠로는 부족하지 않았을까? 그만큼 충격적인 세계관, 섬세하고 화려하게 묘사된 그림, 찜찜하게 생각해보게 되는 이야기 주제까지. 성인이 되고 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명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