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앞에서
에세이를 읽어보자.
백지 앞에서 - 교보문고누군가와 가까워질 때는 그의 모든 것이 온다 거짓 없이, 감춤 없이, 후회 없이 담대한 용기로 빛나는 순백의 글쓰기 『밝은 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첫 산문집product.kyobobook.co.kr우연한 기회로 친구가 참여하는 독서모임에 초대받았다. 최근에 스스로가 편안함을 느끼는 범주 안에만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아오던 차였고, 나와 배경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모임에 참여하면 반강제로라도 완전히 다른 범주에 속해볼 수 있으니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참여한 독서모임은 내 기대만큼 나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자유주제로 책을 읽으니 ‘마니에르 디 부아르’ 같은 처음 들어보는 잡지와 ‘모네, 빛의 순간들’이라는 미술책을 읽어오셨다. 나는 ‘가난한 찰리의 연감’을 읽어갔는데 말이지. 정말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어서 이번 회차에는 ‘백지 앞에서’라는 최은영 작가의 에세이를 공통 책으로 읽게 되었다. 처음 이 책을 전달받았을 때는 빠질까 생각부터 했다. 에세이라니. 소설(첫 책으로 SF 소설 ‘유령해마’를 읽었다)도 이 독서모임 덕에 몇 년 만에 읽었는데, 에세이를 읽어야 한다니. 내가 언제 마지막으로 에세이를 읽었는지, 아니 성인이 된 이후로 내 의지로 에세이를 읽어본 적은 있는지 모르겠다. 편견이 가득한 나에게 에세이는 “대충 힘들지만 너만 그런 게 아니야~~ 오늘 하루도 화이팅!!” 같은 인상이다. 적당히 몽글몽글 말랑말랑한 말들보다 인생에 너무 큰 기대를 가지면 삶이 불행해진다는 찰리 멍거의 말이 더 위로가 되지 않나? 이러니 에세이를 읽어볼 생각을 할 리가 있나. 아무튼 그래도 나라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책, 그리고 장르를 경험한다는 의미에서 억지로라도 읽어야겠다 생각을 하면서 책을 펼쳤다.
예상만큼 책을 읽는 게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3쪽마다 한 번씩 멈추었다.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을 적어둔 글들이 나에게 와닿지는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다만 차분하고 담담한 글인데도 감정과 생각들을 풍부하게 풀어나가는 문장들이 신기해서 그 방식에 흥미를 붙이면서 읽어나갔다. 갑상선암을 진단받은 일을 이야기하는 중반부터는 수월하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는데,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경험한 작가의 이야기 그리고 나라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작가의 다양하고 섬세한 생각들이 조금씩 더 책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무미건조하고 논리를 짜 맞추는 일을 하는 나와, 문장을 쓰는 작가의 생각 방식이 당연히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섬세하고 차분하게 자기 감정과 생각들을 살펴 나간다는 게 놀라웠다. 에세이의 후반부에서는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베트남전이나 세월호, 이태원 참사 등. 에세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고 담담한 어조였지만 작가가 느끼는 고통이나 슬픔, 사회에 대한 아쉬움이 배어나오는 듯 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편집 순서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 책에 적힌 에세이들이 시간순은 아니었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순서를 배치해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거꾸로 순서를 배치했더라면 나는 이 책을 훨씬 수월하게 읽었을 것 같다. 나와 작가가 공유하는 큰 사회적 사건들, 그리고 사회의 책임이나 시선에 대한 큰 주제를 먼저 이야기했더라면 나는 바로 내 의견이나 입장을 생각하면서 작가의 생각과 비교하는 데 집중하며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서였더라면 나는 책을 덮었을 때 지금 같은 느낌을 받지는 못했을 것 같다. 이 에세이를 읽으면서 나는 작가의 삶부터 시작해서 한국의 삶들을 생각하고, 잘 모르는 베트남의 삶을 생각했다. 작가가 쓴 경험과 세심한 모든 생각들이 각각의 삶에 다 고유한 방식으로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니 무게가 다르게 느껴지고, 이 책에서 이야기가 나온 자아의 확장과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험한 기분이었다. 독서모임에서 ‘작가는 자신과 타인의 고통 모두에 예민한 사람’이라는 의견이 나왔는데 정말 그 말 그대로였다. 작가를 통해서 잠깐이나마 많은 고통에 연결된 기분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슬픈 참사들,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를 이야기할 때 나는 그 안의 삶들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참사의 규모나 제도적 문제 이외에 내가 주의를 기울여본 것들이 있던가?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았지만 정작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보았던가 싶었다. 내가 처음에 이 책을 읽을 때 힘들었던 게 내가 타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여본 경험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어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예전에 미국이 사회적 고통을 소화하는 방식에 대한 영상을 보면서 정말 성숙하고 우리도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얼굴이 붉어졌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이 하는 생각과 말들이 너무 공허하고 허세만 가득하게 느껴져서.

처음 너무 힘겹게 책을 읽은 게 무색하게 마지막은 정말 열심히 읽었다. 도서관이 닫아서 쫓겨났는데 짧게 남은 분량을 마저 읽고 집에 가려고 할 정도로. 나 말고 다른 사람의 개인적인 생각을 이렇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서 인생의 경험을 확장할 수 있는 게 에세이의 매력이구만 하고 생각했다. 아직 에세이에 쉽게 손이 가지는 않겠지만… 다음번에 또 기회가 되어 에세이를 읽게 된다면, 이번에는 훨씬 열린 마음으로 읽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