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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28

악의 · 히가시노 게이고

악의 - 교보문고히가시노 게이고가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 「가가 형사 시리즈」 전면 개정판!product.kyobobook.co.kr

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 소설을 한번도 읽어보지 않은 나 같은 사람도 이름은 알고 있는 추리 소설 장르의 거장이다. 얼마 전 대장암으로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이번 독서모임에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소설을 한 권 읽어보기로 하였다.

책을 읽으며 놀랐던 지점은 두 부분이다. 첫 지점은 첫 장이 끝나갈 때인데, 지금까지 책의 내용이 소설의 시간선을 따라 작성되어 가는 수기였다는 점이 일순간 부각된다. 이 순간에, 제목이 노노구치 오사무의 ‘수기’ 였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모든 내용을 사실이자 전부라고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게 상기되어 아찔했다. 작가가 구축한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인 신생아나 다름없는 독자의 입장에서 처음 전해주는 정보를 무턱대고 의심부터 할 수 있었을까? 그걸 이렇게 뒤집다니, 롤러코스터처럼 안심할 때 갑자기 내다 꽂는 간사한 장치라고 생각하면서 소설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런데 이후의 내용은 좀 실망스러웠다. 추리 소설은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고 범인이 특정되는 지점이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어야 할 텐데, 사건의 배경이 뭔가 이가 빠진 듯 엉성했다. 살인 사건의 트릭은 복잡하고 섬세했던 반면 그런 트릭을 고안한 범인의 과거 행동은 믿기 힘들게 단순했고, 아무리 사랑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판단은 멍청했으며, 이 모든 일의 근원에는 한 명의 악인만 있었다는 내용이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이 부분까지 읽었을 때에는 단단히 실망한 상태였다. 아내가 어떠냐고 물어봤을 때 “나한텐 안 맞나봐. 너무 작위적이라서 별로네” 라고 답했다. 이번 장의 제목이 또 다시 노노구치 오사무의 ‘수기’라는걸 까맣게 잊어버린 채로.

두 번째로 놀란 지점이 여기였다. 나는 어느새 앞에서의 경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새 또 수기를 모두 사실이라고 암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배경이 엉성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진위를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작가는 나에게 보란듯이, 가가 형사를 통해 애매한 부분들을 집요하게 파고 들면서 사건의 진정한 배경을 빠르게 밝혀낸 후, 처벌을 받는다던가 남은 인물끼리 대화를 나눈다던가 하는 후일담 하나 없이 칼같이 책을 끝내버린다. 같은 함정에 또 당했다는 민망함과 냉정하게 끝나버리는 이야기의 빠른 템포에 얼얼함을 느끼며 책을 덮었다.

결국 난 작가의 손 위에서 놀아난거다. 어찌보면 작가가 준비해둔 롤러코스터를 가장 재미있게 타고 내려온 게 아닐까 싶다. 등장인물의 글로 된 수기를, 글만이 가지는 그 미묘한 신뢰도의 우위를 이용해서, 소설 내에서 숨겨진 진실과 긴장되게 배치하는 방식이 대단하고 놀라웠다. 책에 수록된 서평보다 이를 더 잘 표현할 수가 없다.

작가는 ‘기록’ 이라는 것의 교활함에 대해 충분히 확신한 끝에 독자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악의, p400

악의의 결말에 대해서 든 생각도 조금 남기고 싶다.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 한 명의 ‘악인’일 때에는 설득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근거 없는 ‘악의’가 되니 설득이 되었다. 모든 행동이 일관되게 악한 사람은 인위적이지만, 순간 고개를 드는 추악한 악의라면 현실적이다. 나에게도 이유 없이 싫은 사람, 일, 상황이 있는 것처럼 누구나 본성 깊은 곳에 추악한 감정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는게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사람의 모습이라 그렇다. 추악한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가 혐오스럽지만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찐득하고 불쾌한 감정. 사건이 일어나는 인간적인 동기에 대한 — 싸이코패스가 아닌 이상에야 살인에는 강력한 동기가 필요하니까 — 히가시노 게이고의 고민과 깊은 관찰이 엿보이는 결말이자 주제였다.